학생운동을 마치고 환경운동에 처음 뛰어들 당시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환경단체의 정책실에서 반상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 단체를 오고가며,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들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낯선 공간도 아니었고, 한동안 하던 일의 연장선이었기에 일이 그다지 새롭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사회운동을 접한 저에게 다소 충격적인 것은 "발빠른 대응"이었습니다.
DJ 정권 초기 개각이 발표되기 전부터 개각 예정자 명단을 뽑아 놓고 실시간 발표를 YTN으로 보면서 개각 인사에 대해 논평을 써 내던 당시 정책팀장의 인상적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시민단체에게 "발빠른 대응"이란 - 기타 여러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 문제를 빠르게 판단하고 분석하여 입장을 "성명서" 혹은 "논평"으로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다 많은 시간을 투여해서 자료를 만드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성명서"와 "논평"은 이미 입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얼마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입장을 정리해서 보도자료를 뿌릴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누구나 "숙달"되는 법입니다.
처음에는 A4 한장의 성명서를 쓰는 일에 반나절이 소요되기도 하지만, 숙달된 활동가의 경우에는 3-4시간, 1-2시간, 심지어 상황 발생에서부터 발송까지 1시간안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후 청년환경센터에서도, 혹은 센터가 사무국을 맡은 한국반핵운동연대나 반핵국민행동, 도롱뇽소송시민행동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줄곧 지켜져 왔고, 저를 비롯한 다른 센터 활동가들에게도 주요한 덕목(!)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빠른 정보 파악"입니다.
정부는 자신의 정보를 결코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잘 가보지도 않는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조용히 띄우거나 언론관계자들에게만 보도자료를 뿌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주요한 사건이 생기고 며칠이 지나서 일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언론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단체에 전화를 걸면서 아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사전"에) 사건이 발생할 것인지를 아는 것 역시 중요한 덕목이며, 이런 것들에 숙달된 활동가는 뛰어난 활동가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특히 4월 중순 이후) 청년환경센터에서는 성명서와 논평의 거의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4월말 지율스님의 유죄선고가 대법원에서 있었을 때나 최근 경주 방폐장 부지 선정이 2년이나(벌써 두번째 늦춰진 것입니다.) 지연되는 일들이 생겼을 때 센터는 성명서나 논평을 내지 않았습니다. 둘다 언론보도 2-3시간 이내(인터넷 발표 기준)에 사건을 파악했고, 센터가 도롱뇽소송시민행동 사무국과 반핵국민행동 사무국으로서 두 사건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생각할 때 - 기존 통념상 - 반드시 성명서나 논평을 내었어야 하는 사안이었습니다. 또한 두 사안 다 다른 환경단체들이 그동안 모니터링해 오지 못해 오던 사안이라 그 중요성을 더욱 높을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센터는 두 가지 사안 모두에 대해 기존의 프로세스 - 즉각적이고 발빠른 대응-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조금은 자세한 해설이 필요할 것 같아 글을 씁니다.
첫째, 기존의 대응 방식 - 단발적 성명서 대응 방식 - 에 대해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응 방식은 90년대 환경운동이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방식입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기자들은 인터뷰 할 대상을 찾게 되고 시간에 쫒기게 되는 기자들은 어쩔수 없이 빨리 성명, 논평을 내는 이들을 먼저 찾게 되어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이를 염두해 두고 빠르게 입장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언론 노출빈도가 높아지는 식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지는 성명서, 논평은 누가 보더라도 반나절짜리 문서입니다.
이 문서를 통해 해당하는 문제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알 수 있겠지만, 충분한 근거와 논리를 찾기는 힘듭니다.
바꿔 말하면, 입장과 태도를 "한 문장(혹은 두 문장)"으로 축약시킬 것을 요구받지, 그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점을 이야기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반핵운동의 예를 들자면, 해당 사고로 "안전성 문제", "위험성", "환경적 피해", "예산상 피해"를 말할 것을 요구받을 뿐입니다. 이렇게 전달된 내용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저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이들"로 보여지기 쉽습니다.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매우 선정적인 한두가지 문장만이 전달되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정당의 논평은 3-4줄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언론을 염두해둔 표현입니다.)
사실 환경문제를 둘러싼 현장에서 - 특히 이 문제에 생소한 이들이 많은 대중공간에서 - 메시지를 전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론이 흔히 취하는 "선정적인 방식"이 단기적으로 매우 쉬울 수 있습니다. 또한 단기적 효과도 클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핵발전소의 문제점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기형아 사진 들고 다니는 것이 이 문제를 생소하게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이고 분명한 메시지로 전달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환경센터 10년을 평가하고 바라보면서 이러한 방식이 적절한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토론으로 남아 있습니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과 충분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배치될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발성 대응이 아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방식과 이에 걸맞는 운영방식은 여전히 고민으로 남는 지점입니다.
둘째, 단순 대응보다 조직재편을 먼저 완료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첫번째를 염두해둔다면, 앞서 지율스님 판결이나 방폐장 공사 연장에 대해 충분한 내용으로 입장을 밝힐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현재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조직 내적인 문제가 더 큰 원인입니다.
지난 3월 총회를 통해 에너지/기후변화/탈핵발전을 중심으로 청년환경센터를 재편하자고 결의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총회 이후 이 내용이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아직 재편이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5월 한달간 그간에 있었던 해묵은 자료와 산적해 있는 인수인계 문서들을 정리했습니다. 많은 자원활동가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아직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직재편 논의를 먼저하고 큰 틀을 먼저 세우고 기타 부수적인 것들을 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한달간은 "병행"하기 보다는 "하나씩 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중간중간 다른 일들이 끼여들어 올 수 있겠지만, 최대한 다른 일을 막고 내부 정리를 먼저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내부 정리가 마무리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큰 틀의 윤곽은 잡은 느낌입니다.
멀리는 1999년부터 가까이는 2004년 이후 - 문서를 통해 - 청년환경센터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4월 발간예정이었다가 늦춰진 -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내용을 더 많이 공급하고자 하는 - "월성 1호기 압력관 교체 및 수명연장" 자료집도 결국 6월로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돌아가거나 늦어지는 느낌입니다만, 문제는 지금까지의 관성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오늘 진보정당 관계자로부터 "왜 경주 방폐장 문제에 대해 성명서나 논평을 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짧은 통화를 통해 간단히만 말하고 말았는데, 다른 분들도 궁금할 듯하여 간단히 생각을 밝힙니다.
조직체계 개편이 끝나고 새로운 조직의 활동방식이 안착된다면, 작성하는 데 1-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 논평 하나 쓰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